<나는 광주 민주화 항쟁 비디오를 82년 워싱턴에서 최초로 제작한 자이다>
민주혁명 사령관으로써 가장 잘한 일은 광주 비디오를 최초 내가 만든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밝혀 지게 되겠지만, 어떻게 하여, 그 비디오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것도 전두환의 눈에 핏기가 가시기도 전에, 미국 시민 권 자도 아닌 나는 언제 소리 없이 없애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이 일을 진행 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남들이 안 해 본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 왔다.
그러나, 나의 일생 중 하이라이트는 82년 미국에서 최초로 제작한 5,18 광주 비디오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이걸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80년 오월 나는 군에서 전역하고 기아 자동차에 근무 할 때 이다.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듣고, 매일 몇 시간씩 이나 광주의 친구와 실시간으로 그쪽 상황을 듣고 있었다. 전화가 모두 끊기기 전 까지는, 그 친구는 노동부에 근무하여, 바로 도청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26일 상황이 종료되고 통행이 해제되자 마자 28일 광주에 내려갔다.
친구들도 궁금 하지만 실로 궁금한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 감정으로 몰고 갈려는 보수 언론,
1.불순 분자의 침투(독침 사건 등)
2.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을 다 죽이려고 하고 있다.
3.LG 대리점 모든 상품을 불 태움.
4.시민 시위대 교도소를 공격
5.MBC 방송국 불 태움
6.수 천명이 죽었다.
전두환은 12.12로 군부의 실권을 쥐고 나서, 다음 단계는 이 나라를 통채로 집어 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종필, 김대중,김영삼을 묶어 놓고 김대중을 잡아 넣고 나니 광주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바로 이거다!." 군대에서 말하는 뽄대를 보여 주어야 겠다 하고 각본을 짰다.
그리하여 505광주 보안 부대에게 편위 공작대를 투입하여, 북한을 찬양하는 전단을 뿌리고,북을 찬양하는 말을 하고 다니게 하였다. 마치, 4.19의 기폭제인 마산의 김주열 학생의 죽은 학생복 주머니에 경찰이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넣으려 다가 발각된 것처럼, 보안대 뿐만 아니라, 공수 부대 하사관에게도 비슷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시민군들은 이런 자들을 붙잡아 "이놈들이 아무래도 수상하니, 우리는 심문할 전문 지식이 없으니 너희들이 조사 좀 해 봐라"하고 군인들에게 넘겨주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지역에 소요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 지역 출신의 지휘관을 보내지 않는 것은 작전의 원칙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오히려 부화내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엘지 대리점 주인이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학생들이 쫓기다 마침 엘지전자 싸터가 내려가는 순간 그 밑으로 2명의 학생이 빨려 들어 갔다. 광주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학생들을 잡아 군인에게 넘겨 주는 일이 없었고 먹을 음식이나 음료수를 주고 동정적 이었는데 이 인간은 문을 다시 열어 군인들에게 넘겨 주는 바람에 안 죽을 만치 두둘겨 맞고 나서 나중에 그 대리점 물건을 다 내놓고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교도소에는 흉악범과 사상범이 있는데, 시위대가 담양쪽으로 나가다가 마침 도청에서 쫒겨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공격을 당하여 수십 명이 사살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들이 그곳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방송이 전두환이 불러준 대로만 읽고 있으니 시민군들이 뿔났다. 북한이 장악한 광주라고 하니 사람들이 돌아 버렸다.
나중에 겨우 몇 백명이 죽었다고 정부에서 발표하여 아직까지도 그 아무도 죽은 사람 신고를 안하니 더이상이 없다라고 하고 있으나, 누가 시체를 여기저기 옮기며 시신수를 늘일려고 하겠는가? 당시 도청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의 수, 적십자 병원에 안치된 시신 수, 전남대병원에 안치된 시신 수 그리고 도청의 접수 후, 마지막 항쟁하다 전멸 당한 숫자,이렇게 종합해 볼때 2,200-2,300명의 사망자가 정확하지 않나 싶다.
나는 그 작전에 투입된 공수 부대에 동기들이 있었으며, 도청을 진압한 13공수의 대대장 임수원중령은 나의 최초 소대장할때 나의 중대장이었고 아군끼리 오인 사격으로 인해 APC가 106미리 무반동총에 박살나고 몰살 당한 사건의 공수부대 대대장 그때 오른쪽 팔을 잃어 버린 조창구중령은 나의 수색중대 중대장 이었다. 또 친구가 상무대 법무 참모로 중령으로 있던 고영록이었다.
그러니, 나는 양쪽 상황을 자세히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82년은 5.18 3년차 된 해였다.
미 정부와 합의 하에 3년 내에는 그 비밀 자료를 풀지 않겠다고 하여 비디오를 가진 자들이 안 줄려고 하였다. 당시에 한국 기자는 오보를 한다고 하여 출입을 금지 시켰으나, 외국 기자에게는 자유로이 촬영을 허락하여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일부는 나중에는 큰 돈이 될거라 생각하고 안 주려고 하는 사람,그 비디오 확보가 쉽지 않았다.
나는 워싱턴에서 고교 동창회에 나갔다가 거기 오래 사셨던 선배를 한 분 만났다. 박백선씨라고 그는 크렙 하우스를 하여 엄청 많은 돈을 벌었다.
다음 날, 나에게 전화가 왔다 "자네 나 좀 보세" 그래서 그가 주인인 팬타곤 모텔에 갔더니 이 비디오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아직 전체적인 것은 아니고 이걸 좀 더 확보하여 비디오를 제작하려고 하는 데, 그 일을 좀 맡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편적인 그 필림을 보고 피가 꺼꾸로 솟는 느낌이었으며, 그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린 업무를 분담 하였다.비디오 확보 및 재정-박백선, 섭외 - 탁병갑(이리 남성고-고대출신) 나- 제작, 나레이터 -김응태 - 부인 왈순 아지매(두분 다 성우 출신)
거기 서문이나 해설은 모두 다 내가 썼다.
당시 이신범(전 국회의원)도 몇 점의 사진을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제작한 비디오를 광주 민주화 운동의 당사자인 DJ가 마침 망명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때였으므로 83년 5.18 기념 행사를 버지니아 고교를 빌려 DJ를 모시고 성대히 거행 했다. 추도사를 읽던 DJ는 그만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가장 많은 한국인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성대히 행사를 치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독일의 윤이상 박사께서 "오!광주"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나중이지만 보내 왔다.
나중에 나는 이 비디오를 김영삼(민추위 공동대표)이우정(민교협 전 서울여대교수)에게 전달 했다.
그저 우연치 않게 시작된 이 비디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루는 커다란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긴가민가 하던 사람도 이걸 보고 나서는 획가닥 해 버렸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이라는 단어도 거기서 내가 처음 사용 하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5.18광주 사태였다.
처음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의 소책자도 제작하였다.
배경 음악 때문에 고심을 많이 했다. 챠이코프스키 "비창"을 배경 음악으로 깔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중요한 자료에 슬라브 민족의 한을 담기 싫어 고민고민 하던 순간 한국교포 4인 실내악단인 그들이 작곡을 하여 한국에서 발표 하려고 한다고 가져 왔는데 "산이슬"을 듣고 그 자리서 나는 반해 버렸다.
그래서 그 유명한 산이슬이 깔리게 되고 그 음악은 이 비디오 때문에 유명해 지게 되었다.
다시 돌아 오는 5.18을 맞으며 ,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님들은 가셨지만, 우린 지금도 계속 중이랍니다.>
-민주 혁명 사령관-
Reported by
인터뷰뉴스TV